문학동네 시인선 176 『여름 키코』

Q1. 안녕하세요, 첫번째 시집 『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』 이후 구 년 만에 신작 시집을 출간하셨는데요. 소감 한말씀 부탁드립니다.

<aside> 💬 시를 쓴다고 말해도 제 시를 자세히 읽어주는 사람은 없었던 것 같아요. 좀더 정확히 말하면 제 시를 좋아해주는 사람이 없으리란 절망 속에 십 년 가까운 시간을 보냈어요. 그럼에도 어떤 날은 제 시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람들에게서 메시지를 받거나 인터넷에서 다음 시집을 기다리고 있다는 글을 보기도 했어요. 시집을 묶으면서 제 시를 기다려준 그들을 떠올렸고 용기를 내어 이제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. 오랫동안 기다려준 분들께 처음이자 진심으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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Q2. 두번째 시집 『여름 키코』는 제목에서부터 첫번째 시집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듯해요. 이번 시집에서 첫번째 시집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.

<aside> 💬 저는 사실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고 생각하는데 (웃음) 다만 이제는 조금 더 제 색깔이 분명해지고 뚜렷해지지 않았나 싶어요. 첫번째 시집에서는 무국적, 연극적 소재를 활용해 어둡고 이질적인 세계를 그렸어요. 존재의 충동이나 욕망을 인터뷰, 편지, 대화 형식 등으로 끌어와 표현하고자 했고요. 이번 시집에서는 조금 더 미니멀한 방식으로 그 안의 정서들을 확장했다고 생각해요.

그리고 제가 나이가 든 탓인지 (웃음) 화자들의 광기어린, 폭주하는 목소리가 첫번째 시집에서보다는 조금 조용해지지 않았나 싶어요. 첫번째 시집이 분열적인 화자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면 이번에는 그 목소리들을 통일하는 데 집중했어요. 그러면서 시적 에너지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는 장면에 대해 계속 생각했던 것 같아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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Q3. 산뜻한 빛깔의 표지 뒷면에는 아이스크림이 새겨져 있어요. 제목뿐만 아니라 시어들도 많이 부드럽고 밝아진 듯하고요. 지난 시간 동안 시 외적으로도 변화가 있었을까요?

<aside> 💬 시를 쓰기 시작하고 십 년 동안은, 특히 등단 이후 몇 년간은 정말 악몽과 같았어요. 나를 온전히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을 몰랐죠. 시가 어렵다는 이유로 독자에게 외면받은 적도 있었고, 문단에서는 시 외적인 측면에서 평가받는 일이 잦았어요. 지치고 괴로웠죠. 그럴수록 내가 가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어요. 거기에 불타 죽어가면서도 지금까지 써온 것들을 뛰어넘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으로 가득했어요. 그 파토스가 제 이십대를 갉아먹었죠. 지금은 쓰는 것보다 정신적, 육체적 건강에 더 신경쓰고 있어요. 이제는 데카르트보다 데드리프트에 더 가까워졌죠. (웃음)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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Q4. 이번 시집에는 여름에 관한 이야기가 무척 많아요. 작가님에게 있어 여름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말씀해주세요.

<aside> 💬 제게는 이 질문이 제일 어렵네요. (웃음) 왜냐면 제가 생각하는 여름의 의미가 시집에 거의 다 담겨 있어서요. 사실 저는 여름 외의 계절은 좋아하지 않아요. 하지만 제 시에는 여름에 대한 예찬보다는 기괴한 여름 풍광이 더 많이 등장해요.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고 의미하는지,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어렴풋이 따라가다보면 제 시에 더 빠지실 수 있지 않을까요. (웃음) 모쪼록 제 시를 읽은 분들이 어떤 여름을 마주하게 됐을 때 ‘아, 주하림의 시에서 봤던 여름이 이런 거였나?’ 하고 생각해주신다면 좋을 것 같아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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Q5. 마지막으로, 『여름 키코』를 읽을 독자들에게 인사를 건네주세요.

<aside> 💬 안녕하세요. 너무 오랜만에 시집을 내게 되어 저를 잊으신 분도 있을 것 같아요. 그렇지만 저를 잊으셨대도 상관없어요. 저는 새로운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나러 왔으니까요. 저는 절망이라고도 부를 수 없을 만큼 캄캄한 곳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여기까지 왔어요. 우리는 행복한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절망이 두려운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.

저는 희망을 말하는 시인은 아니에요. 세상이 살 만하고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아요. 독자들에게 어쭙잖은 위로를 건네고 싶지도 않아요. 그런 건 너무 흔하고 많으니까. 그리고 대개 위로의 탈을 쓰고 진실 뒤에 숨어 있으니까요. 다만 살 만하지 않은 세상에서, 그럼에도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어요. 개인이 어떻게 시대와 직면하는지. 혹은 왜 직시하지 않는지. 고통에 함몰된 채로 고통을 향해 가는 것은 무엇을 말하기 위함인지. 늘 나의 진실을 심판받으면서 그렇게 살아 남겨지는 말들에 대해 생각했고 잊어도 남겨지는 말들에 대해 떠올렸어요. 문학은 누구에게나 하는 따스한 위로가 아니라 상처받은 인간이 문득 마주친 섬광이라고 생각해요.

“위대한 결과는 운명을 건 도전에서 나오고, 모든 영웅은 심판의 순간에 탄생한다”라는 조던 피터슨의 말을 좋아해요. 저는 이십대 내내 제 전부를 쏟아내 도전했지만 다른 분들, 특히 어린 친구들은 자기 자신을 망치면서까지 시를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요.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를 온전히 지키고 사랑하는 방법을 찾기 전까지는 시를 쓰지 말라고 하고 싶어요. 진짜 천국은 천재성도 뭐도 아닌 자기 자신을 잘 돌보는 거예요. 나 자신에게 미안할 일을 덜 만드는 것, 그것들이 지켜질 때 자기가 하는 사랑에 대한 답이 온다고 생각해요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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